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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도 ~ 가을의 기도           - 김현승 -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2024. 6. 8.
바람 속을 걷는 법 ~ 바람속을 걷는 법         - 이정하 -            바람이 불었다 나는 비틀거렸고 함께 걸어주는 이가 그리웠다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 바람이 드셀수록 왜 연이 높이나는지 이른 아침, 냇가에 나가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라 왜 흔들이는지, 하고많은 꽃들 중에 하필이면 왜 풀꽃으로 피어났는지 누구도 묻지 않고 다들 제자리에 서있다 이름조차 없지만 꽃 필 땐 흐드러지게 핀다. 눈길 한 번 안주기에 내 멋대로, 내가 바로 세상의 중심 당당하게 핀다 그대여, 그립다는 말을 아십니까 그 눈물겨운 흔들.. 2024. 6. 7.
폭 설 ~ 폭 설        - 류 근 -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로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니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2024. 6. 5.
사 연 ~ 사 연            - 도종환 -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 하는 게 있습니다. 한 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는 아리고 아픈 이야기들 하나씩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들에 피는 꽃들도. 언덕을 넘어가는 바람도. 부딪히는 파도도. 서쪽하늘로 넘어가는 노을도. 그렇게 말 못할 사연 한 가지씩 있습니다. 한 평생을 살아도 말 못할 사연 한 가지씩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사는 삶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닮는 듯합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 2024. 6. 4.
사랑아 다시는 꽃으로도 만나지 말자 ~ 사랑아 다시는 꽃으로도 만나지 말자           - 양광모 -              나를 사랑하는 너는 잠들었으리  나를 사랑했던 너는 잠들었으리  지우개로 지우다  반즘 남은 글자처럼  투명한 눈물 속에 번지는  푸른 잉크 같은 슬픔  가로의 등을 하나씩, 하나씩 모두 지워도  새벽은 끝내 오질 않고  세로로 곧추서는 표정 잃은 고독이여  사랑의 전생은 바다  사랑의 다음 생은 바람   오늘 사랑의 생은 바보였으니  밤 하나 없는 별이 어디 있으며  사망 하나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내 한숨 쉬며 고백하는 것은  너를 생각하는 밤마다  별빛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금 내 머리 위로 그러하듯이  이것은 내일의 유언  이것은 내일이 미리 쓰는 오늘의 유언  사랑아, 다시는 꽃으로도 만나지 .. 2024.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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