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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          어느 조그만 산골로 돌아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가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2024. 6. 10.
푸르른 날 ~ 0000000000000000000000000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푸르른 날            - 서정주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2024. 6. 9.
가을의 기도 ~ 가을의 기도           - 김현승 -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2024. 6. 8.
바람 속을 걷는 법 ~ 바람속을 걷는 법         - 이정하 -            바람이 불었다 나는 비틀거렸고 함께 걸어주는 이가 그리웠다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 바람이 드셀수록 왜 연이 높이나는지 이른 아침, 냇가에 나가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라 왜 흔들이는지, 하고많은 꽃들 중에 하필이면 왜 풀꽃으로 피어났는지 누구도 묻지 않고 다들 제자리에 서있다 이름조차 없지만 꽃 필 땐 흐드러지게 핀다. 눈길 한 번 안주기에 내 멋대로, 내가 바로 세상의 중심 당당하게 핀다 그대여, 그립다는 말을 아십니까 그 눈물겨운 흔들.. 2024. 6. 7.
폭 설 ~ 폭 설        - 류 근 -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로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니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202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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